평화투어
안성시
1919년 3월 11일, 안성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메아리는 학교와 읍내, 장터와 마을, 산으로도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을 염원하는 3·1운동의 외침은 이렇게 안성을 물들였다.3·1운동기념관은 안성 지역의 만세 운동과 관련한 유물과 기록, 기념비를 모아놓은 의미 있는 장소다. 역사 자료와 모형, 영상, 체험관으로 이뤄진 전시관과 안성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는 사당 광복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일전쟁, 을사늑약과 같은 민족의 수난부터 3·1 독립선언, 그 후 2일간의 해방과 고난의 장소인 서대문형무소, 안성의 독립운동가 등을 주제로 한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3·1운동과 관련된 역사를 배우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태극기를 만들거나 문화해설사와 전시를 감상하며 자세한 설명을 듣는 등 3·1운동기념관 곳곳에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테마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시기에 따라 역사를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현재의 우리나라가 있기까지 목숨 바쳐 희생한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과 독립 정신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그들의 숭고한 뜻을 마음속에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화성시
수원에서 남서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자리한 화성의 한 평온한 농촌 마을에 안타까운 사연이 서려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으로 만세 운동이 퍼졌다. 화성 일대에서도 만세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본래 3·1운동은 비폭력을 원칙으로 했지만, 화성 일대에서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순사 2명을 처단하는 등 무력 항쟁이 전개되었다.일제가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화성 전역에서 방화와 학살을 일삼으며 잔혹한 보복을 이어갔다. 또한 만세 운동 주동자들을 체포하려고 군인을 추가로 파견하고 수촌리, 장안면, 우정면 등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같은해 4월 15일,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교회로 불러 모은 아리타 중위 외 12명의 일본군은 문을 폐쇄한 뒤 무차별 사격해 23명을 학살하고 교회까지 불태웠다.일제의 만행은 63년이 지난 1982년이 돼서야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23명의 유해를 발굴해 제암교회 뒷동산에 안치한 것도 이때다. 화성시에서는 항일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화성 지역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1년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을 개관했다. 3·1운동과 제암리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전시하는 이곳에서는 슬픈 역사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된다.
파주시
임진각 국민관 광지는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며 통일을 염원하는 평화 관광지로 1972년에 조성했다. 임진각을 비롯해 임진강 철교, 자유의 다리, 실향민들이 북쪽의 가족에게 배례하는 장소인 망배단, 평화의 종 등 상징적인 장소를 찾는 관광객이 매년 수백만 명에 이른다. 분단의 아픔을 생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이곳을 둘러 본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기에는 아무래도 평화누리공원에서의 휴식이 제격이다.평화누리공원은 야외 공연장을 너른 잔디밭이 둥글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건축가 민현식이 설계한 공연장과 카페 건물은 녹슨 철조망을 연상시키는 강판을 외장재로 사용해 분단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가슴에 와닿게 했다. 잔디밭에는 이경림의 <솟대 집>, 최평곤의 <통일 부르기>, 김언경의 <바람의 언덕> 등 조형물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특히 드넓은 잔디밭에 색색의 바람개비가 일제히 회전하도록 설치한 <바람의 언덕>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평화누리공원의 상징이 되었다. 자연의 푸르름 속에서 평화로운 휴식을 만끽해보자.
양평군
어릴 적부터 배재학당, 홍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히며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일찌감치 민족 계몽 운동에 투신한 몽양 여운형의 생가다. 생가 바로 옆에 기념관을 조성해 여운형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기도 하다. 중앙선 신원역에서 기념관으로 걸어오는 길부터 ‘몽양 유객문 夢陽 留客文’을 비롯한 여운형 선생의 말씀이 새겨진 16기의 어록비를 볼 수 있다.기념관은 총 2층으로, 1층에는 여운형의 삶과 업적이 고스란히 담긴 전시물이 놓여 있어 그의 일대기를 살필 수 있다. 또한 여운형과 함께 크로마키 사진을 찍고 1매씩 출력해서 가져갈 수 있어 관람객들의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2층에는 생가를 복원해놓았다. 1885년에 태어나 1908년 부친 탈상을 끝내고 서울로 이사 갈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 점차 퇴락해 바깥채 지붕이 초가로 변경됐다가 한국전쟁 중 소실되기도 했다. 2001년 양평 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 터가 정비됐고 2011년 복원됐다. 집 안에 전시된 가구는 1930년대 이후 여운형이 살았던 서울 계동 집에 있던 것으로 후손들이 기증했다.
연천군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전망대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북한을 느낄 수 있는 곳, 태풍전망대다. 서울에서 약 65km, 평양에서 약 140km 떨어진 비끼산 수리봉에 위치해 있다. 맑은 날에는 임진강과 더불어 북한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망원경 없이도 밭일하는 북한 주민이 보이기도 한다. 가시거리가 좋은 날에는 개성까지 내다보인다.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드넓게 펼쳐지지만 닿을 수 없는 곳이기에 아쉬움도 크다. 눈에만 담아야 하는 것 역시 못내 아쉽겠지만 북쪽을 향해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 유념하자.태풍부대에서 1991년 이 전망대를 건립했다. 당시만 해도 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2km 지점에 위치했다. 이후 철책선이 점점 밀려나 현재는 휴전선까지 800m, 북한 초소까지 1,600m 거리에 있어 가장 가까이 북한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이곳에 오면 누구나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북녘 땅에 대한 아쉬움을 느낀다. 실향민을 위로하는 망향비와 한 국전쟁 전적비, 6·25 참전 소년전차병기념비 등이 있다. 별도로 마련된 전시관에는 이곳에서 약 2km 떨어진 임진강 최상류에 위치한 필승교에서 수습한 북한의 생활용품을 살필 수 있다. 태풍전망대를 방문하는 개인 관광객의 경우에는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하며 25인 이상 단체 관람을 원할 때는 적어도 일주일 전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김포시
역사·문화의 고장인 김포시내 곳곳에 흩어진 애국선열의 흔적과 역사를 모아 정리해둔 곳이 있다. 1919년 김포지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선열을 기리는 독립운동기념관이 바로 그곳이다. 당시 김포 지역의 총 9개 면 가운데 7개 면에서 15회에 걸쳐 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며, 그 규모는 양촌면 오라니 장터 시위에 1만 1,000여 명이 집결할 정도로 컸다.1층은 ‘김포평야에 울려 퍼지는 독립의 함성–김포 사람들 속에 살아 숨 쉬는 호국과 애국의 DNA, 그 뜨거운 열망이 독립의 함성으로 되살아난다’를 주제로 한 전시를 선보이는 상설전시실이다. 이곳에서는 실제 사용했던 태극기, 태극기 목판, 독립선언서, 항일 의병 무기 등 3·1만세운동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다. 그 밖에 영상실, 기획전시실, 사료 열람실도 마련되어 있다. 특히 영상실에서는 시청각 자료를 통해 독립운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기획전시실에서는 매년 삼일절과 광복절 무렵이면 기획 공연과 체험 부스를 운영해 3·1만세운동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게 한다. 사료열람실은 북 카페를 겸한 휴식 공간으로 꾸몄다. 독립운동기념관은 김포시의 랜드마크이자 아이부터 어른까지 교과서 밖에서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한민족의 얼을 일깨워주고 김포 항일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해와 독립 정신을 바로 세우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